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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책

[독서 노트] 오래 준비해온 대답

by litaro 2020. 8. 31.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는 믿고 보는 책이고... 난 시칠리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서 어떤 곳인지도 궁금하여 손에 집어 들었다.

최근에 출간해서 당연히 최근에 시칠리아에 다녀왔구나 하면서 읽었는데 프롤로그에서 보니 이 책은 원래 10년전에 나온 책인데 절판된 이후 꾸준이 이 책을 찾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편집하여 제목을 바꿔서 출판했다고 한다. 10년전 책이니...여행시기도 스마트폰 이전의... 구글맵도, 트립어드바이저도 없는 시절의 여행담인것이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 시절의 여행에 대한 향수가 있다. 늘 우리 차에는 최신판 전국지도가 있었고... 아빠의 뛰어난? 방향감각에 놀라면서 여행을 하곤 했다. ㅋㅋㅋ 그 때는 네비게이션이 없었기에 속도위반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알길이 없었지만... 끈끈한 운전자들의 연대감?으로 반대차선에서 라이트를 깜빡이며 알려주었다. 좀 있으면 속도카메라가 있다고 ㅋㅋㅋ 이것에 난 괜히 가슴 뭉클해졌다... (불법은 아니니까 모~ ^^;;;) 아무튼 저자는 이보다는 훨씬 이후 시절이었지만.. 시칠리아는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나라는 아니었을텐데 어떻게 여행했을지 궁금했다.

왜 시칠리아인가? 

EBS 여행 프로그램 프로듀서가 나를 찾아와 어디로 여행하고 싶으냐고 묻고 나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하는 장면. 생각해보면 내 많은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었다 한동안 잊어버린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다시 그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 곳에 가 있다. 그런 여행은 마치 예정된 운명의 실현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그래서 시칠리아에 촬영차 가보았고 갖은 고생?을 하며 촬영하면서 시칠리아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벤쿠버로 초청교수로 가게 되면서 집을 팔고 남은 기간 2달 반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아내와 함께 가게 되었다. 

작가의 책을 정리하는 기준?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는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그 세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 집을 떠났다. (책을 헌책방으로 보낸 것은, 그래야 책이 가장 자신을 필요로하는 사람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로 ...

시칠리아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 난 몰랐다. ^^;; 오래전 내가 가본 곳도...다들 가는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관광지였었기에...

이탈리아 지도 (구글맵)
시칠리아 지도 (구글맵)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섬이었다. 메시나가 이탈리아 반도로 통하는 시칠리아의 관문이라고 한다. 항구다 보니 당연히 배로 들어와야하고... 기차를 타고 기차가 배에 올라타서 가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파업으로 인해 기차를 탈 수 없어서...  결국 돌고 돌아... 직접 짐을 끌고 배를 탔단다.

리파리...

https://www.visitsicily.travel/en/sicily/messina/the-aeolians/lipari/

작가 부부는 메시나에서 다시 배를 타고 북쪽 리파리 섬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지인의 집을 빌려 잠시 정착하였다.

2007년 겨울, 나는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에서 한동안 기시감에 사로잡혀 먹먹해지는 마음을 다잡느라 애를 먹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 그리스식 극장 때문이었다. 이십 년 전의 그 노천극장이 거기, 시칠리아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라쿠사의 퇴색한 석회암계단에 앉아 저멀리 희부무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며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회상했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낮선 곳으로 떠나는 갈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나는 그때의 노래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하여 반복하던, 그래서 신입생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었던 그 응원가는 이렇게 끝난다. 그대요, 그대여어어, 너와 나는 태양처럼 젊었다.

https://www.italymagazine.com/taormina

낯선곳에서 무언가 트리거가 되어 세월속에 가라 앉아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경험을 나도 하곤한다. 트리거는 음식일 때도 있고 분위기 일때도 있고... 눈앞의 광경일때도 있고... 그럴때가 되면 한동안 그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곤 하는데...

섬의 인구는 1만 800명 가량인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가 살던 성산동의 아파트단지 하나에만도 그것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작은 섬의 인구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선 많은 사람들이 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젼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고 있는 반면, 이곳의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에스프레소를 마시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참... 씁쓸한 얘기다. 한국의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아파트 작은 공간에서 전자기기와 함께 한다는 것... 하늘을 나가서 직접 보기 보다는 예쁜 하늘을 보여주는 유투브 영상이나 인스타 사진을 보며 감탄하는... (하지만 아마 이번에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질리도록 이것을 해서 만약 코로나가 끝나게 되면... 갑자기 모두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까 싶기도...) 

난 장농면허라서 늘 차 뒷좌석에 타기 때문에 차를 타고 보는 시야에 한계가 있다. 운전자가 탁트인 앞유리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창이 없는 스쿠터... 바람과 향기를 맡으며 직접보는 것이다. 작가의 리파리에서의 스쿠터 일주를 보면서 나도 해보고 싶다는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ㅋㅋㅋ

섬의 서쪽 사면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실로 장엄한 풍경이 갑자기 나타났다.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볼카노섬이 보였는데 아이맥스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또렸했다. ... 구름들이 절벽을 스쳐 해협을 통과하며 붉은 지평선을 향해 몰려갔다.나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그 어떤 이미지도 내가 본 것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2.5인치 액정에 담긴 해협과 절벽, 볼카노의 풍경은 빛바랜 관광엽서처럼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쿠터를 타고 달려와 맞이한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것의 일부였다.

글쎄. 산위에는 뭐가 있었을까? 포도밭, 절벽, 바위들과 금잔화, 레몬이 열리는 나무와 농부들, 트랙터 같은 것들, 나는 그런것들을 주절주절 이야기 했고 카메라에 담아온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눈치 였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될때,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격렬히 반응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와우...격하게 난 이 문장에 공감하며~!! 맞아. 내가 본 그 광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가 없다. 그리고 카메라에 남은 동영상이나 사진은 절대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광경을 함께 한 사람과는 끊을 수 없는 연대감이 생긴다. 비록 그 광경을 다르게 느꼈을지라도 본 광경은 같기에 함께 얘기할 것이 많이 때문이다.

에리체...

에리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를 닮았다. 미야자키 감독은 하늘에 떠 있는 중세도시를 상상했다. ... 에리체의 기슭에 안개라도 끼면 애니메이션 속의 라퓨타와 영락없이 똑같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에리체를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반드시 좋아했을 것이다. 

에리체가 급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천공의 섬 라퓨타>도 참 좋아한 애니메이션 중 하나라서...ㅋㅋ 검색해보니 에리체는 '천공의 섬'이란 별명이 붙여진 곳이란다. 

https://www.freepik.com/premium-photo/erice-sicily-italy-castello-di-venere-medieval-norman-castle_7001994.htm

어쨌든 그 키클롭스들이 있던 곳이 바로 에리체라는게 그 지역 사람들의 주장이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폴리페모스의 절벽이 있고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도) 외눈박이 거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작가의 표현이 너무 위트있다 ㅋㅋㅋ

노토...

https://www.cntraveler.com/galleries/2016-05-19/why-noto-sicily-is-our-italy-destination-of-the-summer

엄청난 사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말 그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렇게 태연하게, 그리고 기습적으로 알려주는 책은 여행안내서 밖에 없는 것 같다.

노토 사람들은 자기들로선 감당하기 벅찬 이 호사스런 건물들과 널찍한 대로를 부담스러워하며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는 익숙해져서, 그냥 거기에 그게 있나보다 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로마의 콜로세움도 한 때는 채석장 대용으로 쓰였다지 않는가. 그러다 최근에 누군가가 "여기 시칠리아 최고의 바로크 도시가 숨어 있었다! " 고 외쳤을 것이다. 그제야 노토 시민들도 자기 주변을 돌아보고는, 어쩌면 여기 뭔가 그럴듯한게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긴... 누군가는 그 도시의 유명한 건축물을 보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가지만...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지나쳐가는 동네 건물일 뿐이다. ㅋㅋ 

식도락이야 말로 순간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도 없고 잘 보존하여 간직할 수도 없는 성공의 것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어느 한순간 최고의 행복감을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천천히 사그라진다. 몇 줄의 문장으로 겨우 남을 뿐이다.

난 사실 식도락?을 모른다. 미각이 뛰어나지도 않고... 누군가는 우동 한그릇 먹겠다고 일본에 당일치기 간다던데... 나에게는 이해안가는 일일 뿐이다. ㅋㅋㅋ 어쩌면 부럽기도 하지만... 그런 열정을 쏟아 부을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작가 말처럼... 음식은 먹으면 사라지기에... 맛을 느끼는 순간을 간직해야한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억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을 어찌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면 확실히 세상을 사는 자세가 달라진다. 엄마가 환갑을 못넘기고 돌아가시면서 엄마와 함께 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남는 건 사진' 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유난히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 찍는다. 남들은 귀챦아서 찍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담아 기억하고 싶다.

아그리젠토

https://www.tiqets.com/en/agrigento-attractions-c71484/tickets-for-the-valley-of-the-temples-agrigento-fast-track-p977347/

우리가 묵은 호텔의 주인은 아그리젠토 남자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흰 양복 윗도리를 걸치고서야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정중했다. 자신의 힘과 위세를 충분히 과시하면서도 필요한 친절은 잊지 않았다. 허겁지겁 메뉴를 결정하려는 우리를 만류하며 그는 우아한 태도로 차가운 물 한잔을 권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될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어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ignora, prego. È 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작가는 딩크족으로 자녀가 없다고 한다. 결혼하면서 아내와 얘기를 나누고 함께 정했다고 한다. 솔직히 부럽다. 나이 마흔에 잘나가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작품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일하며 외국에서 한 달 반동안 여행할 수 있다는 것... 아이가 있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또 아이가 있어서 내가 성장하는것을 느낀다. 아이는 별것 아닌일이 별것이 아닌게 아님을 가르쳐주고...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굳어진...틀에 박혔던 나의 고정관념을 깨며 유연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여행을 함께 하는 동지가 있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다. 여행하면서 들었던 말 한마디가 우리에게 마법의 주문이 되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 또한 가족과 해외 여행 중에 재밌었던 외국인의 말투를 누군가 흉내내기 시작하면 그 때를 떠올리면서 까르르...마냥 웃을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엔 뭐지 저 가족? 하겠지만...ㅋㅋㅋ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곤 한다. 낯선 이에게는 결코 내보이지 않는 행복한 표정의 얼굴들이 반딧불이처럼 희부윰하게 빛나는 광경은 볼 때 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그렇다 ^_________^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나 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안주하고 싶어진다. 새로운 것은 싫고 오랫동안 해온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황들이 매순간 나를 새로운 곳으로... 원치않는 곳으로 등떠밀고 있어 힘든 시기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상황을 감사해야 하나보다 싶다. 상황이 아니었으면 내가 절대로 가지 않을 길을 걷고 있음에...